현상을 보고 원리를 추측한다. 그리고 용케도 서로 앞뒤가 맞는 논리를 짜맞추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현대과학을 이루어 냈다. 그럼에도 알 수가 없는 것들은 언젠가 알아낼 것이라고 믿으며 여전히 논리적 장치 속에 가설이라는 이름으로 달아놓았다. 사실 그 결과물의 대소는 차지하고라도 과학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에 대해서는 모든 인류가 감사의 말씀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과 느낄 수 없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틀을 짜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원리를 터득해서 새로운 것을 추론해나가면 참 좋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상을 관찰하며 규칙을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 과학이다.
케이블. 아마도 오디오 장비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기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기와 기기를 연결해서 전기적으로 소통시키는 임무를 띠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전기만 잘 통하면 만사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원리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것저것 시도할 때마다 케이블은 기묘한 성격을 표출하며 이렇게 저렇게 소리의 느낌을 바꾸고 그때마다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 와중에 결정적 성능의 향상을 과시하는 물건들이 나타나고, 그런 제품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애호가들에 의해서 새로운 제품의 생명력 또한 결정된다. 모름지기 시장에는 가격을 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제품의 가격을 정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일지라도 제품이 존재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다. 그렇게 해서 어떤 제품은 굉장히 비싼 가격을 붙이게 되기도 한다. 쿠발라 소스나의 케이블이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쿠발라 소스나의 리뷰 제품을 들고 돌아온 것은 실수라 여겨진다. 모든 오디오 관련 제품은 – 하다못해 작은 기기 받침대 하나라도 – 자기의 독특한 개성과 색깔을 지니고 있다. 그런 작은 차이들이 모여서 시스템의 개성을 창조한다. 쿠발라 소스나의 하이엔드 라인업인 일레이션(Elation) 밸런스 케이블과 스피커 케이블을 시스템에 연결했다.
밸런스 연결이라서 블라델리우스 프레야 SACD 플레이어와 MBL의 6010D 프리의 연결에 투입하고 KR의 모노블록 파워와 와트퍼피 6를 연결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진공관에 충분히 열이 올랐다고 생각될 무렵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듀크 조단의 "Flight to Denmark"를 넣고 약 30초가 지났을까…. 이 케이블의 리뷰를 맡은 것은 큰 실수였다는 것을 대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소리가 너무 좋아서 어쩌고 하는 평론가들의 진부한 표현이 아니다. 정말 큰 실수였다.
쿠발라 소스나에서 제공하는 아주 제한적인 자료에는 이 시커멓고 뻣뻣한 케이블의 비밀이 뭔지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스피커 케이블이나 밸런스 케이블이나 외관의 디자인에 대해서 뭐라고 논평할 거리가 '전혀' 없다. 단지 튼실하게는 생겼다. 자신들이 특허를 가지고 있다는 'OptimiZ™' 라는 기술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이런 게 있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쓰시게나' 라고 말하는 투다.
단지 한 가지 명확히 강조하는 점은 자신들의 케이블이 전송하는 구형파가 완전한 형태로 전송된다는 것뿐이다. 새로운 제품을 리뷰할 때는 그 제품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음악으로 표현되는 것이 흥미롭고 재미있는 점이다. 그런데 이 케이블에는 그게 없다.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상쾌한 기분을 자아낸다. 그리고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가 수년째 사용해 오고 있는 레퍼런스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에서 역시 내가 심사숙고해서 선정해 넣은 인터케이블과 스피커 케이블이 쿠발라 소스나의 일레이션으로 교체되어 있다. 그렇다면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케이블의 특성은 제거되고 일레이션의 개성이 표출되어야 한다. 그것이 들리질 않는다.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다.
케이블이 자기 존재를 감추고 신호를 있는 그대로 전송한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품성이지만, 불행히도 그 어느 애호가나 평론가도 있는 그대로의 신호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로 봉착한다. 뭔가 괴상한 소리가 지금 나오고 있으며 무척 순수한 듯 들려온다. 하지만 이것이 어느 수준의 순수함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음악을 오래 듣는 수밖에는 없다. 결국 이 케이블은 오랜 시간 시청실에서 머물게 되었다.
아마도 쿠발라 소스나의 개발진은 음악이 만들어지는 현상을 목격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현상과의 연관변수를 발견해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 둘 불필요한 변수를 제거해 내어 긍정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다. 언급한 듀크 조단의 음반을 들어보면 일레이션이 대단히 에어리한 케이블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에어리한 케이블의 대명사인 A사의 고급 제품에 다소 비어 있는 소리가 내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일레이션은 쉽게 지적한다.
또, 일레이션은 앰프질라의 SACD 샘플러가 가지고 있는 카랑카랑한 에너지감을 제법 리얼하게 표현한다. 그 순간 시청자는 K사의 케이블이 굉장히 많은 잡음을 동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리빙스테레오의 SACD 버전인 번스타인이 연주하는 쇼팽의 발라드는 건반 하나하나에 뽀송뽀송하고 탱글거리는 음상이 피어난다. 이 소리는 S사의 초고가 케이블에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렇게 일레이션이 보여주는 소리의 세계는 맑고 투명한 창으로 경치를 바라보는 느낌을 전해준다.
이 제품들은 대단히 고가의 제품들이다. 시스템 전체의 가격이 이 케이블 가격 정도만 유지가 되더라도 상당히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 케이블의 가장 큰 장점이자 또 단점이 바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점이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야 한다. 이는 자신의 시스템의 튜닝을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제품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무척 까다로운 사용상의 제약이 된다. 소유하고 있는 전체 시스템의 대역과 밸런스가 아주 잘 만들어져 있는 경우 비로소 쿠발라 소스나의 일레이션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게 된다.
일레이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결국 다른 곳에 있다. 들어 왔을 때의 존재감은 거의 없는 반면 떠나고 나면 치명적인 허탈감을 준다는 것이다. 에너지의 형태와 성격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여 자신의 모습을 없애는 기기 – 어쩌면 고도의 설계 기법으로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지도 모르는. 어느 쪽이던 일레이션이 추구하는 순수성에 대한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스템에서 빠져 나갔을 때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재기발랄하고 함께 있어서 즐거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곁을 떠나면 무척 허전하다. 그래도 견딜 만하다. 그런데 곁에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순간 그런 사람들이 곁에 없는 것을 깨닫게 되면 쉽게 시무룩해진다. 유령과도 같이 쉽게 자신의 존재를 보이지 않으나 시스템의 전 영역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이한 효과를 일레이션 케이블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전체 시스템의 대역과 밸런스가 아주 잘 만들어져 있는 경우 비로소 쿠발라 소스나의 일레이션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게 된다.